산행기

남해 금산 산행

단군자손 2013. 9. 29. 15:59

남해 금산 산행

 

  ◆  일       시 : 2013. 9. 28(토) 08:10~18:25(여천 기준)

  ◆  코       스 : 두모입구-부소암-상사바위-금산-보리암-쌍홍문-금산탐방지원센터(주차장)

  ◆  소요시간 : 4시간20분(두모입구 10:00-부소암 11:00-헬기장 11:22-상사암 11:40-제석봉 12:17-금산정상 12:37-

                       단군성전 12:48-연화봉 12:57-보리암 13:05-일월봉 13:15-쌍홍문 13:35-장군봉 13:37-사선대 13:40-

                       거북이식수대(폐쇄) 13:53-금산탐방지원센터(주차장) 14:21-차량출발 15:00-상주해수욕장 하산주 출발:16:20

                       ※ 소요시간은 금산에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으므로 의미가 없음(5시간이면 충분함)

  ◆  소요경비 : 30,000원(여수순천천지산악회 회비)

  

남해 금산!

1977년 여수에서 여객선을 타고 남해 상주해수욕장을 다녀온 적이 있고

남해금산은 2003년 상주에 위치한 한려해상국립공원금산분소에 일때문에 갔다가

승용차로 복곡주차장에서 내려 보리암을 잠깐 둘러 본 경험이 있어 경치가 좋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2008년『한국 현대시 100주년』기념으로 詩人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로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이란 시와 정끝별 시인의 해설를 읽게 된 후 남해 금산의 보리암은 물론

기암괴석이 많다는 것과 특히나 '남해 금산' 詩의 해설에 나오는 상사암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반갑게도 산악회에서 남해 금산 산행 계획이 있어 참여하였다.

 

남해 금산은 한려해상 국립공원중에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삼남(전라, 경상, 충청) 제일의 명산으로,

38경의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닮았다하여 소금강 또는 남해금강이라 불린다고 한다.

 

금산은 신라 원효대사가 이 산에 보광사를 짓고 보광산이라 불러왔는데,

조선태조 이성계가 젊은 시절 이 산에서 백일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하게 되자

영세불망의 영산이라 하여 온 산을 비단으로 두른다는 뜻으로 금산(錦山)으로 이름을 바꿨단다.

 

금산 정상에 있는 보리암은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이기도 한다.

 

남해 금산 산행은 두모리에서 두모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금산 38경의 하나인 남해 양아(상주)리 석각과

부소암을 거쳐 헬기장에 도착하면 탐방 안내도가 있는데 탐방 순서를 익혀야 빠뜨르지 않고

기암괴석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초행길이고 산악회를 통해서 가다보니 하산 시간을 맞추어야 하는 심리적 부담감 때문에

마음이 쫒기고 또한 탐방자료가 없어서 현장에 볼때는 무슨 바위인지 모른채 사진을 찍었다가

사진을 정리하면서 알게 되고, 산악회 일행중 한 분이 제석봉을 못 보았다고 하여보리암에서

다시 제석봉을 갔다가 내려오면서 보리암으로 내려와야 했는데 지름길을 택하여

내려오다가 그만 음성굴과 용굴을 보지 못했다.

또한 일월봉, 화엄봉, 대장봉, 향리암 등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채 사진은 찍었는데

사진을 정리하고 포스팅을 하다보니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는다. 

이제는 내가 안내자가 되어 여유롭게 가족들과 다시한번 더 가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남해 금산 38경

1. 망대  2. 문장암  3. 대장봉  4.형리암  5.탑대  6.천구암  7.이태조기단  8.가사굴  9.삼불암  10.천계암 

 11.천마암  12.만장대  13.음성굴  14.용굴  15.쌍홍문  16.사선대  17. 백명굴  18.천구봉  19.제석봉 

 20.좌선대  21.삼사기단  22.저두암  23.상사바위  24.향로봉  25.사자암  26.팔선대  27.촉대봉  28.구정암

29.감로수  30.농주암  31.화엄봉  32.일월봉  33.흔들바위  34.부소암  35.상주리 석각  36.세존도

37.노인성 38.일출경

 

 남해 금산의 이 산행도는 별로 의미 없음

 

남해 금산을 가고자 할 때는 이 안내도는 필수적이며, 두모계곡에서 오를 때는

  ①~⑬까지 순서를 따라가면 편리함  

 

 

 두모입구 주차장 10:04

 

두모입구

 

 

 

  

남해 양아리 석각(안내판에는 '남해 상주리 석각'으로 표기 됨, 설치 후 지명이 바뀐 듯) 10:20

 

양아리 두모에서 부소암으로 오르는 골짜기 큰 바위에 새겨진 고문자. 양아리 석각,"서불 과차"라고 하는

고문자(뒷부분의 검정색에 새겨짐) 진시황의 사신 서불이 선남선녀 500명을 거느리고 불로초를

캐려고 이곳에 와서 새겨놓고 간 글자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 거란 글자라는 이도 있고,

"이곳은 그 어른의 사냥터"표시라는 설도 있으나 판독이 어려워 아직껏 베일에 싸여 있다.

 

 부소암 아래 전망바위에서 10:52

 

 10:58

 

 10:58

 

 동기와 불사 모연합니다. 부소암 주지암장 11:03

 

 

 

 

 

 부소암의 전설 11:10

 중국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갔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법왕대라고도 한다.

박진욱의 [역사 속의 유배지 답사기]중에서 문득 엄청나게 큰 바위가 하늘로 해처럼 솟았다.

그럴 듯한 이름 하나 주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으니, 이름하여 "부소암"이다.

"부소"는 중국 진시 진시황의 태자 이름이다.

 

남해 외딴섬 바위에 어이 하여 진나라 시황의 큰아들 이름 부소가 붙었을까? 누가 붙인 이름일까?

유배객이 붙인 것은 아닐까? 이 금산에 올랐던 류의양이 붙였을지도 모르고, 남구만이 붙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간신배의 참소로 억울하게 이 고독한 외딴섬에 귀양 온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임금이 콩과 보리를 가리듯이 충신과 간신을 가리지 못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말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진나라 시황의 태자 부소이다. 진시황의 두 아들이 있었다.

똑똑하고 착한 부소와 흐리멍덩한 호해가 그 두 아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인은 자신보다 똑똑하고 착한 사람을 싫어하는 법이다.

간신배 이사와 환관 조고는 장차 부소가 임금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시황에게 참소를 넣었다.

"부소가 폐하를 바라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부소를 만리장성 쌓는 곳으로 보내라."

진시황은 호해를 가까이하고 부소를 멀리 변방으로 내쳤다. 올

빼미의 무리 이사와 조고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부소가 폐하를 원망합니다."

 

진시황은 부소에게 칼을 내렸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어라는 말이다. 부소는 그것이

간신배가 꾸민 간괴인 줄 알고 불로초를 찾아 삼신산으로 떠나는 서불의 배를 타고 도망을 쳤다.

서불이 동으로 동으로 배를 몰다가 남해 금산에 도착하였다.

'서불이 이곳을 지나다가'

서불은 양아리 골짜기의 바위에 왔다는 흔적만 남기고 다시 떠났다. 그러나 부소는 떠나지 않았다.

신령스런 바위 아래에 움막을 짓고 살다가 주어진 수명을 누리고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부소암이라 불렀다.

역사에서 부소는 진시황이 보낸 사약을 받고 변방에서 죽고, 둘째 아들 호해가 임금 자리를 계승하였다.

호해가 임금이 된 지 3년 만에 진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움막이 지금도 있다.

부소가 살았던 그 움막일까? 절벽에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속세 사람의 집이 아니다.

도 닦는 사람일까, 부소처럼 쫓겨와서 숨어사는 사람일까?

예나 지금이나 속세를 떠나 숨어사는 이는 끊이지를 않는구나.

 

 부소암 꼭대기 중앙의 바위 모습이???

 

  

부소암 좌측 아래 부분의 바위 모습

  

부소암에 헬기장 부근에 설치 된 부소암 안내판 11:22 

 

부소암을 지나면 헬기장이 나오고 금산 탐방 안내도가 있는데 그곳에서 탐방 순서를 결정해야하고 

자세히 기억하는게 좋다. 다른 곳에도 몇 군데 안내도가 있지만 전체를 기억하기 어려우므로

금산 산행도가 아닌 탐방 안내도를 꼭 지참하는게 좋다. 

  상사바위로 가면서 아련한 추억이 깃든 싱싱한 억새를 만나 넘 기뻐서 촬영을 했다.

 

 좌측의 상사암(바위)과 함께 어우러진 바위들 11:32

 

 상사암 정상에 본 두모리,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 설흘산.응봉산, 여수.돌산읍, 남면 11:36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그리고 상주해수욕장 11:37

 

  상사암 정상의 전경

 

 상사암에서 바라 본 금산의 절경이 금강산을 닮은 듯함 12:03(점심 식사 후) 

 

  상사암 정상이지만 사진속의 모습은 탑대인 보리암전 3층석탑에서 보아야 함 11:39

 

  남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삼각바위에서 주먹밥 점심을~~~ 

 

 촉대봉 12:10

향로봉 옆에 있는 촛대 모양의 작은 바위. 원효, 의상, 윤필 세 대사가 기도를 올릴 때

촛대로 사용했다는 전설이 있다

 

촉대봉을 지나 금산산장의 중간지점으로 바위 이름은 알 수 없음 12:12

 

 12:13

 

 금산산장에서 바라 본 제석봉(좌측) 12:13

 

 금산산장 12:15

 

  금산산장을 약간 지나서 상사암을 바라보며

 

 12:17

 

제석봉에사 바라 본 사자암 12:18

 

  제석봉에서 본 금산산장

 

 제석봉에서 본 향리암, 보리암, 탑대(보리암전 3층석탑) 12:22

 

제석봉에서바라 본 일월봉, 뒷쪽은 향리암, 일월봉은 보리암 탑대에서 보아야 함 

 

 제석봉에서 본 향리암, 보리암 12:22

 

 흔들바위 12:26

일월봉 왼쪽 제석봉 뒤쪽 맞은편에 있는 흔들바위로 거북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구암(龜岩)이라 하였으나

한 사람의 힘으로도 움직인다 하여 흔들바위라고도 부른다. 바위의 무게는 35톤 가량 된다.

거북 모양의 목부분을 위로 추켜 세우듯 밀면 가장 잘 흔들린다. 움직인다고???ㅋㅋㅋ...

 

 흔들바위에서 단군성전을 보고 금산을 올라야 하는데 지나치고 오르면서...

 

 남해 금산이 681m, 705m 인지 헷갈림, 망대높이가 24m일까?  12:35

 

 문장암 12:36

 망대를 오르는 계단을 마주하고 있는 정상 길목을 지키는 바위다. 명필바위라고도 한다.

문장암은 남해금산의 정상에 있다.

조선 중종 때 대사성을 지낸 한림학사 주세붕선생이 전국을 다니며 풍류를 즐기다가

남해에 있는 금산이 명산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금산의 쌍홍문을 통하여

이곳 정상까지 올라와 보니 과연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신비로운 전설이 가득함으로 감탄하여

자연암에다 '유홍문 상금산 由虹門 上錦山' 이라는 글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주세붕(1495-1554)은 조선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자는 경유(景游)이며 호는 신재(愼齋). 1522년(중종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했다.

1541년에 풍기군수가 되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소수서원)을 건립했다.

이 서원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이다. 홍문관, 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금산정상의 망대 12:37

 

 금산 망대에서

 

 금산 망대에서

 

  금산 망대에서

 

 금산 망대에서 내려오면서

 

 12:49

 

  단군성전

 

 

 단군성전 내부

 

  단군성전 외부 전경 12:52

 

 화엄봉 직전 바위 12:56

 

 화엄봉을 내려오며 우측으로 일월봉 12:56

 

 화엄봉 안내판의 모습은 보리암에서 볼 수 있음 12:57

 

 화엄봉에서 보리암을 내려가며 본 대장봉 12:58 

금산 보리암 바로 뒤에 우뚝 솟은 큰 바위로서 웅장하고도 위엄있게 창공을 찌르고 서 있는 모습이

대장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대장봉 왼쪽에 용호농주형(龍虎弄珠形)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있으면 반드시 대장(大將)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리암에서(일월봉과 화엄봉) 13:02

 

 보광전에서

 

 

  보광전

 

 보광전에서 본 일월봉

 

   탑대 13:06

천인단애 위에 보리암전 삼층석탑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탑이 서 있어 이 절벽을 탑대라 한다.

보리암 바로 밑에 있으며 전망이 좋아 봄철의 푸른 나뭇잎과 가을 단풍 경치는 천하절경이라 할 만하다.

가장 탐방객들이 많이 모여드는 자리다.

보리암전 삼층석탑은 지방유형문화재(地方有形文化財)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리암전 3층석탑(우), 바위는 일월봉(좌)과 화엄봉(우)

 

 탑대에서 본 상사암(상사암 안내판의 사진 배경과 같음)

 

 탑대에서

 

쌍홍문을 내려서며 13:34

보리암에서 제석봉을 다시 갔다가 지름길로 내려오면서 음성굴과 용굴은 못 봄  

 

 쌍홍문 안에서, 자세를 낮추면 남해바다를 배경을로 잡을 수 있음  

 

 쌍홍문 올라가며 들어서는 입구

 

 쌍홍문은 상주 쪽에서 금산 상봉에 이르는 암벽에 두 개의 둥글고 큰 구멍이 문 모양으로 나란히 있는

돌문이다. 이 속에 들어가 보면 속이 비어 있고, 천장 벽에도 구멍이 뚫어져 있어 파란 하늘이

잡힐 듯이 보인다. 옛날 세존이 돌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으로 나가면서 앞바다에 있는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나갔기 때문에 세존도에 해상동굴이 생겼다고 전해온다.

 

 금산 38경에는 들어 있지 않음

 

  

사선대는 쌍홍문에서 바로 아래 오른쪽에 서 있는 네 사람 모습으로 생긴 바위.

옛날 삼신산의 네 선녀가 놀다가 갔다는 전설에 따라 사선대라고 한다. 13:44

 

 사선대를 지나 내려오면서 숲사이로 보이는 사자암

 

 거북이식수대이나 물은 먹을 수가 없다. 13:53 

 

 거북이식수대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며 얘기를 나누는 일행들

 

 탐방로 입구.출구 14:21 

 

 금산탐방지원센터

 

 

 주차장

 

 주차장에서 본 남해 금산! 상사암이 유난히 돋보인다.

 

 14:30경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일행중 한 분이 오지 않아 하산시간 15:00까지 기다렸다가

15:00에 남해상주해수욕장인 이곳으로 이동하여 200회 기념 하산주 및 저녁식사 

 

남해상주해수욕장(스마트폰 파노라마로 촬영) 16:05

 

남해 금산의 절경에 감탄하며 즐거웠으나 사전 지식이 부족하여 아쉬움이 많은 산행여행 이었다.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의 詩와  정끝별 시인의 해설을  다시 읽어보며 다음을  기약 해  본다.  

 

 

남해 금산 /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해설 : 정끝별시인>

돌 속에 묻힌 한 여자의 사랑을 따라 한 남자가 돌 속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돌의 연인이고 돌의 사랑에 빠졌음에 틀림없다.

그 돌 속에는 불이 있고, 목마름이 있고, 소금이 있고, 무심(無心)이 있고, 산 같은 숙명이 있었을 터.

팔다리가 하나로 엉킨 그 돌의 형상을 ‘사랑의 끔찍한 포옹’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데 왜, 한 여자는 울면서 돌에서 떠났을까?  어쩌자고 해와 달은 그 여자를 끌어주었을까?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한 남자를 남긴 채. 돌 속에 홀로 남은 그 남자는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기면서 부풀어간다.

물의 깊이로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의 부재를 채우며. 그러니 그 돌은 불타는 상상을 불러일으킬밖에.  그러니 그 돌은 매혹일 수밖에.


남해 금산, 돌의 사랑은 영원이다.

시간은 대과거에서 과거로 다시 현재로 넘나들고, 공간은 물과 돌의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안(시작)도 없고 밖(끝)도 없는 그곳에서 시인은 도달할 수 없는 사랑의 심연으로 잠기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이 되고 바위가 되는지 남해의 금산(錦山)에 가보면 안다.

남해 금산의 하늘가 상사암(相思巖)에 가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불길 속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채 돌이 되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의 고통 속에서도

요지부동으로 서로를 마주한 채 뿌리를 박고 있는지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을 들여다보면 안다.


모든 사랑은 위험하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더욱 치명적이라는 것을,

어긋난 사랑의 피난처이자 보루가 문득 돌이 되어 가라앉기도 한다는 것을,

어쩌면 한 번은 있을 법한 사랑의 깊은 슬픔이 저토록 아름답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남해 금산’에서 배웠다.

모든 문을 다 걸어 잠근, 남해 금산 돌의 풍경 속. 80년대 사랑법이었다.


80년대 시단에 파란을 일으킨 이성복의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는,

기존의 시 문법을 파괴하는 낯선 비유와 의식의 초현실적 해체를 통해 시대적 상처를 새롭게 조명했다.

‘남해 금산’은 그러한 실험적 언어가 보다  정제된 서정의 언어로 변화하는 기점에 놓인 시다.

 

 

      이성복(李晟馥, 1952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에    진학하여 1982년 << Baudelaire에서의 현실과 신비 >>로 석사학   위를,

       1990년 <<네르발 시의 易學的 理解>>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7년 계간 《문학과 지성》 겨울호에〈정든 유곽 에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계명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1984~1998)를 거쳐 현재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1998~)이다.


       1982년 2회「김수영문학상」, 1990년 4회「소월시문학상」, 2004년 12회「대산문학상」, 2007년 53회「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